[그 시절 영화] 아름다운 시절

Spring in my Hometown, 감독 이광모, 출연 이인, 김정우, 안성기, 1998.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배우의 연기(演技)가 아니라 감독의 탐미적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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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절의 잿빛 풍경화 – 아름다운 시절

추억 미화의 함정

추억은 모두 아름다운 것일까. 아무리 고단했던 시절의 일도 일단 추억의 강을 건너고 나면 저녁놀에 반짝이는 강 물결처럼 우리를 눈이 부시게 하는 것일까. 꽁보리밥에 검정 고무신으로 요약되는 그 유년 시절이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답게 채색되고 그리움의 색조가 깊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과거에 산다는데, 그렇다면 노인들도 그 아름다움에 취하느라 옛날로의 추억여행을 거듭하는 것일까. 그러기에 그 순간의 눈망울은 패이고 주름진 눈자위 속에서도 그토록 해맑을 수 있는 것일까.

1950년대 한국의 초상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1998)은 우리를 문득 반세기 전의 옛 고향마을로 데려다준다.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하던 1952년의 한 시골 마을, 여기에는 나지막한 초가들이 있고, 정겨운 돌담길이 있고, 물레방앗간이 있고, 논밭과 강이 있고,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있다. 이 영화는 주로 동네 개구쟁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어른들의 세계

창희와 성민, 간이 천막 학교 초등학교 5학년짜리 두 까까머리 소년이 이 영화의 중심인물이다. 아버지가 의용군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창희네는 가난해서 성민이네 집 아래채에 얹혀살고, 성민이네는 아버지 최 씨가 미군 부대에 빌붙어 매춘을 알선하고 군복 염색을 도맡은 덕분에 자전거에 라디오까지 갖출 정도로 형편이 펴있다.

어느 날 동네 물방앗간에서 미군의 ‘뺑코’ 장면을 훔쳐보던 창희는 몸을 파는 여자가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방앗간에 불을 지르고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미군에게 자기 딸까지 소개하며 돈벌이에 재미를 붙이는 최 씨는 기와집을 사서 이사를 하지만 채 스무 살도 안 된 그의 딸은 미군의 씨를 받아 배가 불러간다.

미군 지프만 보면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꽁무니를 따르던 동네 아이들은 빈 상여를 만들어 뒷동산에 창희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성민의 아버지는 미군 물건을 빼돌리다 들켜 페인트 세례를 받고 일자리를 잃는다.

<아름다운 시절>은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들의 이야기인가 싶으면 어른들이 끼어들고, 어른들의 이야기인가 싶으면 다시 아이들이 뒤섞인다.

우물에 숨은 공산군 부역자를 끄집어내 혼을 내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숨바꼭질과 말타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비치고, 천막 학교 멍석 위에 앉아 ‘고향의 봄’을 부르는 장면이 나왔는가 싶으면 ‘빨갱이를 쳐부수자!’라며 목청을 돋우는 반공강연회를 펼친다.

이 영화는 195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시골 마을의 풍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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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영화 제목 <아름다운 시절>은 추억 어린 유년과 인정미 넘치는 고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작 관객이 만나는 그 시절의 풍경들은 어둡고 추하고 슬픈 것들이다. 물론 이 영화의 화면은 지극히 아름답다.

빼어난 영상을 담으려고 전국 방방곡곡 안 찾아다닌 데가 없다는 감독의 고백을 듣지 않더라도,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에서 1950년대의 한국적 정취를 담아내고자 안간힘을 쓴 감독의 땀방울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 비치는 것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미풍양속과는 거리가 멀다. 걸핏하면 미군 지프가 흙먼지를 일으키는 이 마을에는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아낙이 있고, 방화와 살인을 하는 소년이 있고, 물건을 빼돌리다 들켜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사내가 있고, 또 돈만 아는 아비 때문에 혼혈아를 낳아야 하는 처녀가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나타난 시골 마을은 결코 평화롭거나 인정미 넘치는 따뜻한 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지프와 초콜릿으로 대변되는 전쟁과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전통 윤리가 깨어지고 빈부의 격차가 벌어져 가는 오염된 사회인 것이다.

감독이 그리고자 한 것은 과거사에 대한 낭만적인 미화(美化)가 아니라, 오히려 1950년대라는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두웠던 초상화가 아닌가 싶다.

이광모 감독의 독특한 연출 기법

<아름다운 시절>은 여느 영화에 비해 새로운 점이 많다. 우선 고정된 자리에서 오래 찍기를 한 촬영 기법이 돋보인다. 이광모의 카메라는 한 군데 눌러앉으면 좀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른다. 대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결코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는 법이 없이 담담히 지켜볼 뿐이다.

여러 각도의 장면을 이어 붙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몽타주(Montage)와 같은 기본기마저 무시한 그의 영상은 그러므로 지극히 정적(靜的)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관객은 그 장면들을 실제 어느 동네 한 귀퉁이에서 구경하고 있는 듯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또 하나 새로운 점은 자막을 통한 사건의 해설이다. 작은 일화(逸話)들로 연결된 이 영화에서 관객은 종종 앞뒤 연결이 안 되는 장면들을 마주치며 의아스러워진다. 예컨대, 잠결에 오줌을 싼 성민이가 마루에 나왔을 때, 그의 눈에 띈 아랫집 마루에 망연히 앉아 있는 창희 어머니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이때 관객은 성민이와 더불어, 저 여자가 왜 밤중에 잠도 안 자고 저러고 있나 궁금해한다. 허탈에 빠져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 같은, 무슨 일일까 하고 갖가지 추측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얼마 후 그 장면이 끝날 무렵 자막의 글귀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잃어버린 미군 속옷 빨래를 창희네는 끝내 찾지 못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절>의 화법(話法)은 일단 관객에게 장면을 먼저 제시해 주고 그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제공하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어쩌면 기존 영화의 화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전개 방식에 따분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조로운 일화들로 연결되는 이 영화가 그러한 독특한 기법으로 흥미를 끌었기에 관객은 지루함을 잊고 한 시간 오십 분을 몰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감독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름다운 시절>은 배우의 영화가 아니라 철저히 감독의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배우의 연기(演技)가 아니라 감독의 탐미적 영상이다.

특히 검정 빨래가 줄줄이 널린 강변의 풍경이나, 성민이네가 달구지를 앞세우고 굽이굽이 산골짜기의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그 배경음악과 함께 무척이나 공을 들였음 직하며, 여기서 영상미에 집착하는 감독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의 별난 고집스러움으로 인해 관객이 치러야 하는 불편함도 없지 않다. 단편적인 이야기 부스러기에 뒤섞여 줄거리가 산만하다든가, 시종일관 고정된 화면으로 인해 역동성이 부족하다든가, 가까이 찍기를 회피한 까닭으로 등장인물의 표정 연기를 가까이 볼 수 없는 점 따위는 화끈한 할리우드 영화에 길든 이에게는 필경 답답함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시골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들판에서 곡식을 거둔다거나 쟁기질을 한다거나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점은 아쉬움을 주며, 냇물에서 고기 잡는 아이들 모습이나 비사치기와 쥐불놀이, 장수하늘소 싸움 붙이기 등 다양한 옛날 놀이의 재현(再現)도 좋지만, 사춘기 아이들의 이성(異性)에 눈뜨는 이야기도 잠깐 곁들였더라면 이 영화에 윤기가 더해지지 않았을까.

향수를 넘어선 기억의 재구성

감독은 왜 이 영화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을까. 전쟁으로 뒤숭숭하던 시절, 미군이 흘린 라이터를 신기해하고 그들이 던진 초콜릿에 환호하는 가운데, 전통 윤리관이 무너지고 빈부 격차가 벌어져가는 암울한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서 왜 감독은 아름답다는 제목을 붙였을까.

그것은 그것이 추억의 강을 건너온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집요하게 추구한 영상의 향토성 때문일까, 아니면 고달픈 시절에 대한 반어적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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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